[프리즘] 보편적 언어를 쓰기 시작한 북한

지난 3월 5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부인 리설주와 함께 한국의 대북특사단을 맞이했다. 만찬장 입구에서 김 위원장은 앞에 섰고 리설주는 조금 뒤쪽 오른편에서 손님을 기다렸다. 특사단 대표인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먼저 김 위원장과 악수를 하고 리설주에게 가 악수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의 대화가 조금 길어졌다. 김 위원장은 다음 남측 인사인 서훈 국정원장과 악수를 하려 손을 올렸다. 하지만 서 원장은 리설주에게로 갔다. 김 위원장은 올리던 손을 내리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그다음, 또 다음 남측 인사도 모두 김 위원장을 지나쳐 곧바로 리설주에게 갔다. 김 위원장은 웃으며 리설주에 자리를 내주었고 리설주는 앞쪽으로 나왔다.

이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민망할 수도 있는 상황을 김 위원장은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넘겼다. 지금까지 알려졌던 북한의 최고 권력자의 모습과는 달랐다. 더구나 이 장면은 하루 뒤인 6일 북한이 공개한 영상 내용이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김 위원장이 부부 동반으로 한국 특사단을 맞은 것이 가장 큰 변화다. 하지만 악수 장면은 눈에 보이지 않게 북한 권력 상층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대목이었다. 유연하다고 할까, 덜 경직됐다고 할까.

이 짧은 장면은 그저 스쳐 가는 것이었지만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대변화를 알려주는 대목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북한은 외부를 향해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했다. 감정이 극도로 고양된 그 격렬한 언어는 이질감을 불러일으켰고 때로 전문가의 해석이 필요했다. 하지만 최근엔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부부가 함께 손님을 맞았고 부인이 주목을 받자 최고 권력자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양보했다.

상대방의 언어로 말하는 장면은 2일에도 있었다.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이 남측 기자단을 찾아와 사과한 대목이다. 남측 예술단의 평양 공연 취재가 제한된 것을 놓고서다. 김 부위원장은 "사죄라고 할까, 양해를 구한다"고 말했다. '사죄'라는 단어까지 썼다. 놀라운 일이다. 같은 크기로 주목할 것이 있다. 사과에 앞선 김 부위원장의 발언이다. "취재 활동을 제약하고 자유로운 촬영을 하지 못 하게 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이질감도 없고 전문가의 해석도 필요 없다. 보편적인 언어다. 한국 공무원이 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언어다.

따지고 보면 언제부턴가 북한은 누구나 이해할 언어로 말하는 보통국가를 지향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국내 행사에서 부인과 동행한 것은 꽤 됐다. 이것이 외부 행사로 연장됐다. 김정은의 공식 직함이 국무위원장인 것도 그렇다.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있던 북한은 군을 앞세운 선군정치였다. 당연히 김정일의 공식 직함은 군사위원장이었다. 최근 북한이 리설주를 여사라고 호칭하는 것도 보편적 언어를 사용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중 정상회담이 열렸고 북·러시아 외교도 활발하다. 지난 8~9년 동안 만남 자체가 드물었던 한반도가 이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외교 총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일부에서 성사에 비판론과 회의론이 나왔던 북·미 회담 날짜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5월 말~6월 초를 언급했다. 북한은 입에 담기조차 싫어했던, '상대방의 언어'였던 비핵화 의제를 얘기한다.

최근의 상황을 북한의 기만술로 보는 시각은 여전히 존재한다. 정상회담의 결과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북한이 계속해서 보편적 언어를 쓴다면 비핵화와 평화의 가능성도 그만큼 높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안유회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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