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세] 캐러밴 80% 온두라스인···그 배후엔 가짜뉴스 있었다

“국경 난민 문제에 적극 협조하겠다. 대신 200억 달러(약 22조원)를 지원해 달라.”


지난 1일(현지시간) 출범한 새 멕시코 정부가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 요청한 ‘딜’입니다. 사회운동가 출신 좌파 성향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AMLO·암로) 대통령은 취임 다음날인 2일 마르셀로 에브라르드 신임 외교장관을 미국으로 급파했습니다. 에브라르드 장관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만나서 위와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국경 골칫거리를 해결해줄테니 ‘돈 좀 줍쇼’입니다.

알려진대로 요즘 미국은 멕시코 국경의 캐러밴(Caravan·중미이민행렬) 사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불법으로 국경진입을 시도하던 이들에게 국경수비대가 최루탄을 쏴서 비인도적이라는 비난에 휩싸이기도 했지요. 트럼프 대통령이 암로 대통령에게 이들을 멕시코 쪽 국경에 묶어놓도록 요구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멕시코가 되레 트럼프 정부에 ‘이민 흥정’을 제안한 격이지요.

사실 미국 땅을 향한 캐러밴 행렬은 이번이 처음도 아닙니다. 그런데 올해 유난히 세계 언론의 관심도 뜨겁고 미국과 관련국들 간의 외교 설전도 치열합니다. 트럼프 이민정책의 가늠자 역할을 하게 된 캐러밴은 누구이며, 이들은 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요. [고 보면 모 있는 기한 계뉴스, 알쓸신세]가 온두라스로부터 미국까지 4300㎞ 대장정의 뒷얘기를 들려드립니다.

드라마 '나르코스'처럼…강도·살인 무법천지
어린아이를 한 팔로 안고 과테말라와 멕시코 국경 사이 강을 건너는 캐러밴 이민자. [로이터-연합뉴스]
혹시 드라마 ‘나르코스’를 아시나요. 2015년 넷플릭스가 방영을 시작한 ‘나르코스’는 콜롬비아 출신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와 그를 쫓는 미국 사법당국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마약 카르텔의 치열한 패권 다툼과 이를 막으려는 미 마약단속국의 추격을 실감나게 그렸다는 평가를 받지요. 게다가 지난해 9월엔 로케이션 매니저가 멕시코 현장답사를 갔다가 총탄에 맞아 숨진 채 발견돼 ‘드라마보다 더한 현실’을 실감케 했습니다.


실제로 중남미와 카리브해 지역의 삶은 혼돈과 파국 그 자체입니다. 얼마 전 미주개발은행(IDB) 발표에 따르면 이 일대에서 발생하는 강도 사건이 인구 10만명당 321.7건으로, 세계 평균의 3배를 웃돈다고 합니다. 최근 20년 간 살인 사건은 250만건입니다. 세계 총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이지만 세계 전체 살인 사건의 39%가 이 일대에서 벌어진다는군요.

때문에 역내 41개 도시가 세계 50대 우범 도시에 포함돼 있는 형편입니다. 특히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와 멕시코의 아카풀코,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 온두라스의 산 페드로 술라는 인구 10만명당 80건이 넘는 살인 사건이 발생해 세계 평균을 무려 10~20배나 뛰어넘습니다. 범죄에 당하지 않으려 차라리 범죄조직원이 되는 기로에 설 정도랍니다.

이런 혼란을 피해 사람들은 미국으로 향합니다. 온두라스 제2의 도시인 산 페드로 술라를 기준으로 미국과 접경하는 멕시코 티후아나까지 거리는 4300㎞가 넘습니다. 산과 강과 계곡을 통과하는 이민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강도·강간·살인·인신매매 등에 종종 희생됐고 최대한 이를 막을 방편으로 무리를 지어 이동합니다. (여러 명의 상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사막지대를 이동하는 것을 뜻하는 ‘캐러밴’이라는 말이 이들 이민 행렬에 붙게 된 이유지요.)

간신히 미국 국경에 도착한다 해도 하루 100명 정도로 이민 심사를 제한하다보니 수개월~수년씩 차례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걸 불법으로 통과하려다 최루탄 세례를 맞은 온두라스 모녀의 딱한 사정이, 로이터통신 한국인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돼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지난 25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소속 한국인 김경훈 사진기자가 촬영해 전 세계 미디어와 네티즌들에게 캐러밴(중미 이민행렬) 사태에 대한 경각심을 촉구하게 된 사진. 미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와 접경을 이루는 멕시코 티후아나에서 미국 쪽으로 국경 진입을 시도하던 온두라스 출신 이주민 모녀가 국경수비대가 발사한 최루탄을 피해 뛰어가는 장면이다.[로이터=연합뉴스]

그런데 원래 미국과 멕시코 국경의 골칫거리는 멕시칸, 즉 멕시코인들이었습니다.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은 미국의 4개 주와 멕시코의 6개 주에 접하는데 전체 길이가 3141km나 됩니다. 불법 입국자도 허다합니다. 2000년에는 합법·불법 이민자가 160만명에 이르렀는데 이중 90%가 멕시칸들이었습니다.

80년대 친미 vs 공산 내전 이후 이민행렬 늘어
미 정부의 강력 억제책과 멕시코 정부의 범죄조직 소탕 작전 등에 힘입어 이민자들은 꾸준히 줄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강력한 반이민정책을 편 것도 주효했습니다. 2017년 9월 기준으로 연 이민자는 31만1000명 가량에 그쳤습니다. 이 중 멕시칸은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는 어디서 왔을까요. 온두라스·과테말라·엘살바도르 등입니다. 2010년 이후 이들 기타 나라의 증가세가 확연합니다. 특히 온두라스인이 10명 중 8명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이라고 합니다.

왜 온두라스일까요. 원래 온두라스·과테말라·엘살바도르 등지에선 정치 불안과 빈곤을 피해 미국으로 향하는 행렬이 줄곧 이어져 왔습니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정부 시절 중남미의 친미 정권과 그에 대항하는 공산 반군들이 내전을 벌이면서 미국의 개입이 깊숙해진 탓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온두라스와 이웃한 니카라과에 산디니스타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온두라스는 중남미 좌파벨트를 저지할 미군의 기지 역할을 하게 됐습니다. 일대가 혼란한 틈을 타 마약 산업이 번창했고 온두라스를 탈출하는 행렬은 계속 늘었습니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이런 캐러밴은 기껏해야 한번에 수백명 규모를 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티후아나에 도착한 캐러밴은 역대급 규모인 4000~5000명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이 온두라스에서 온 이민자들입니다. 온두라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이 배후 인물로 지목되는 이가 온두라스 좌파정당인 자유재건당(Libre·리브레) 소속 바르톨로 푸엔테스 전 국회의원입니다. 푸엔테스는 원래 학생운동 지도자 출신의 언론인으로 1999년부터 이민자들을 조직해왔다고 합니다. 지난 4월에도 수백명의 캐러밴을 멕시코 국경까지 올려보내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이민자 지원" 소문나자 수천명으로 불어나
그런데 지난 10월 4일 그가 페이스북을 통해 '이민자 행진'이라는 행사를 제안한 게 온두라스 친정부 매체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HCH라는 이 뉴스채널은 산 페드로 술라의 버스터미널에 모인 이민자를 인터뷰했고 아무 근거 없이 “이들이 푸엔테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움직인다”고 전했습니다.

실제 의도는 푸엔테스를 음해하려는 것이었는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이 보도는 이민희망자들을 자극했습니다. 200명이 채 안되게 출발한 행렬은 과테말라 국경을 넘을 때 2000명으로 불었고 한때 7000명까지 치솟았습니다. 멕시코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흩어지거나 일부는 돌아가면서 티후아나까진 5000명이 채 안되게 도착한 걸로 추정됩니다.

푸엔테스는 이들 캐러밴과 함께 이동하다 과테말라에서 체포됐습니다. 그는 “캐러밴이 눈사태처럼 불어날 거라고 누가 예견했겠느냐”며 “정부는 이민 행렬의 규모를 애써 눈감아 왔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한다는 게 백일하에 드러났다”고 주장했습니다.

올해 캐러밴 사태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는 온두라스 자유재건당(Libre·리브레) 소속 바르톨로 푸엔테스 전 국회의원. 이민자들과 이동하면서 찍은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사진 페이스북]
그러나 후안 오를란도 에르난데스 온두라스 대통령은 푸엔테스가 반정부 소요 목적으로 캐러밴을 조직한 거라고 비난합니다. 또 푸엔테스의 배후에 2009년 군부 쿠데타로 축출된 호세 마누엘 셀라야 전 대통령이 있다고 의심합니다. 이는 쿠데타 이후 온두라스 경제가 악화돼온 책임을 야당 측에 돌리려는 의도도 있을 겁니다.

온두라스는 현재 국민의 3분의 2 가량이 빈곤선 이하에 살고 있을 정도로 경제가 파탄 상태입니다. 최저임금이 월 370달러(약 41만원)에 불과한데 그 와중에 노동인구 절반은 불법·음성지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만연한 마약 범죄조직과 갱단 때문에 범죄율이 높고 특히 올해는 기근으로 인해 식량난까지 겹쳤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11월 대선에서 에르난데스 대통령이 석연치 않은 투·개표를 통해 재집권하면서 정치 갈등도 악화 일로입니다. 푸엔테스 등 야권은 캐러밴 사태를 온두라스 실태를 전 세계에 알리는 '기회'로 삼으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습니다.

트럼프 "원조 삭감" 위협이 통하지 않는 이유
온두라스 정치권만 캐러밴을 ‘정치 이슈’로 활용하는 게 아닙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역시 캐러밴을 “침략자”라고 표현하면서 중간선거에서 자신의 지지세력을 결집하는 데 활용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캐러밴 사태의 책임을 이들의 본국, 즉 온두라스·과테말라·엘살바도르에 돌리면서 이들 나라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원조를 끊겠다고 위협합니다. 미국의 중미 원조액은 트럼프 정부 출범 후 다소 줄어 연 6억 달러 규모인데, 이들의 재정에 절대적 동앗줄이나 다름 없습니다. 때문에 원조 삭감은 큰 타격이 됩니다.
갱단 등의 표적이 되는 걸 피하기 위해 수천 수백명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캐러밴. [AFP=연합뉴스]

하지만 그리 쉬운 선택은 아닙니다. 무턱대고 줄였다가 이들 정부가 마약단속에 삐딱하게 나오면 트럼프 정부로선 더 큰 골칫거리가 되니까요. 나아가 이들 국가들은 미국 원조가 끊기면 중국에 대신 손 벌릴 가능성이 큽니다. 벌써 엘살바도르는 중국 눈치를 봐서 대만과 단교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암로'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멕시코의 새 대통령이 세게 '베팅'한 거지요. 암로는 일단 티후아나 국경에서 캐러밴을 후퇴시켜 좀더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난민 수용소를 설치하는 식으로 트럼프의 환심을 사고 있습니다. 일부 캐러밴을 본국에 돌려보내는 작업도 시작했고요.

수천㎞ 이국 땅에 흘러들어온 캐러밴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지, 온두라스의 혼란은 어떻게 치유될지 세계가 주시하고 있습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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