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삶] 갑과 을

나보다 한마디쯤 앞서는 눈물도 갑이다/ 항상 참을 수 없이 흘러 나를 이긴다// 외길만 고집하는 모성도 갑이다/ 잘 빗고 꾹꾹 눌러주어도/ 다시 제길로 돌아오는 가르마처럼// 좌절을 용서 못 하는 결심도 갑이다/ (…)다 안다고 믿는 당신의 현재도 갑이다/

-윤인미 시인의 ‘을(乙)의 논리’ 부분

갑(甲)이라는 말에는 유쾌하지 않은 기미가 있다. 흔하게 들어온 ‘갑질’이란 말 때문인 것 같다. 갑은 갑질을 한다. 갑질이란 말에는 약간의 폭력성이, 우월감에 취해있는 덜 성숙한 사람의 행동이 엿보인다.

갑이란 위치나 여건에서 우월함이 내포된 자리이다. 자리만으로도 위압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갑은 질이라는 어떤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위압적이다. 갑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는 까닭이다.

나의 자리는 을에 가깝다고 늘 여겨왔다. 여자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시대적 층위는 하위였다. 며느리라는 돌파구 없던 인습의 자리, 어미라는 운명성은 매사 최하위였고 말석이라는 문단의 자리 역시 끄트머리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은근히 갑의 행세를 해왔다. 나의 갑질도 꽤 유래가 깊다.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동생들에게 우선권을 내주지 않았다. 부엌일에 이력이 좀 생겼다고 남편에게 밥을 해주니 마니 하면서 먹을 것을 놓고 으름장을 놨다. 모성을 앞세워 나의 취향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기도 했다. 갑의 유치한 행동이다.

갑에게 ‘갑질’이란 게 있다면 을에게는 ‘논리’가 있을 수 있다. 을의 논리는 갑에게 맞서는 대응적 자구책일 것이다. 아니면 갑과 을의 자리가 바뀌는 것에 따른 변명거리라고 해도 될까. 갑과 을은 관계의 파트너십일뿐, 상하관계만은 아님에도 사람은 갑이라는 주도권을 쥐었을 때 나남할 것 없이 자리의 힘을 과시하고 싶게 된다.

멋진 을이란 없는 걸까. 을이 하수가 아니라 ‘어떤 자리’로 정당함을 지닐 수 있다면 가능할 것 같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면 어디에나 갑이 있는 곳엔 을이 있게 마련이다. 모두가 갑이 되지는 못한다. 을은 확고한 논리가 있어야 한다. 멋진 을이란 정당해야 하며 갑에게 맞먹을 용기가 있어야 할 것이고 비겁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멋진 을이 많아진다면 아무리 서슬 퍼런 갑이라 할지라도 맥을 못 쓸 것이다.

대기업 오너들의 갑질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곤 한다. 물 컵을 직원에게 집어던진다든가 먹던 라면을 발등에 부어버린다든가 하는 행동들이 공분을 사기도 한다. 갑의 이런 행동이 문화 속으로 침투해 문화현상이 되면 사회는 뒷골목처럼 무례해질 것이다.

우위를 선점한 이들에게는 확실히 뭔가 남다른 데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대기업이 그렇고 지도층이 그럴 것이다. 그들이 지닌 막강한 힘을 치사하게만 쓰지 않는다면 충분히 존경받아야 하다고 생각된다.

시인은 말한다. “일기예보에 예고된 비도 갑이다. 텅 비어서 빛나는 마음도 갑이다. 다 안다고 믿는 당신의 현재도 갑이다.” 이런 갑이라면 괜찮은 갑 아닐까. 이런 갑에게선 어떤 갑질도 나올 수 없겠다.

갑도 을도 삶이라는 원형 안에서 각자의 위치일 뿐이다. 을이 없이 갑은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다.

조성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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